학생인권의 날, 우리가 교육감에게 항의한 이유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학생인권의 날을 바라며 - 강수민
2026년 1월 26일, 나는 지혜복 선생님에 대한 부당해임 철회 및 교육감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아침 선전전에 함께했다. 이후 서울시의회로 가 정근식 교육감의 축사에 강력히 항의했다.
당시 학생인권의 날 14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의회에서는, 상반된 현실들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성폭력 피해 학생의 편에 선 지혜복 선생님에 대한 해임을 철회하지 않고 시위에 참여한 23명을 폭력 연행했던 정근식 교육감은 축사 초청을 받아 무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하지만 그 날은, 지혜복 선생님을 비롯한 'A학교 공대위(A학교 성폭력 사안,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 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교육청 앞 노숙농성에 돌입한 지 4일째가 된 날이기도 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청렴문화 확산과 공익제보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공대위는 몸에 은박지를 두르고 정근식 교육감과의 면담을 기다렸다. 하지만 교육청 정책보좌관은 이를 "업무방해"라고 칭했다.
정근식 교육감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라는 회피성 답변만을 늘어놓으며 행사 당시 항의를 "연출"이라 폄하했다. 그와 동시에 정 교육감은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던 정근식 교육감이 '못 참겠'을만큼 분노했던 사안은 A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도, 공대위가 겪은 부당함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축사를 '방해'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부당해임과 성폭력에 관해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제압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총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노의 방향을 잘못된 현실이 아닌 이를 알리고 저항한 이들에게로 돌리는 방식의 공격은 행사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잇따랐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 반문하고 싶다. 여기서 지칭하는 '학생'에 왜 성폭력 피해자는 배제되었는가. 학생인권을 '방해'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누가 잘못된 현실에 대한 해결 의지 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꾸며 이를 현실인 것마냥 둔갑하고 '연출'해왔는가.

당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겪은 고통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실은 오랜 차별과 혐오의 축적으로 당사자가 이를 증언할 권리마저 빼앗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다. 사회가 가해자에 공감하고 그의 미래를 걱정하는 동안, 피해자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수없이 경험하며 나타나지 않을 것을 강요받는다.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은 비난과 공격·고립의 이유가 되지만, 가해를 저질렀던 과거는 필요에 따라 때로는 자랑거리가 되고 때로는 '미래를 위해' 언제든지 없었던 일처럼 지워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교육현장은 과연 이 구조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고 가려놓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대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A학교가 바로 그랬다. 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피해사실을 알렸으나 돌아온 결과는 피해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가해자의 보복이었다.
학교에서는 '명랑운동회'를 열어 피해자에게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였다. 평화와 화합을 빙자한 2차 가해였다. 공익제보 교사 지혜복은 부당전보와 부당해임을 겪었다.

그리고 사회에는 수많은 'A학교들'이 존재한다. 2024년 9월, 딥페이크 성폭력이 공론화되었을 당시 수많은 교육기관의 대처 방식은 '여학생들이 SNS에 올린 사진을 지우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이 현실에 대한 해결 의지를 접어두고서 "학생 인권"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권리"의 목적은 바로, 차별과 폭력 없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권력을 동원하여 누군가의 존재와 삶을 지워내고 빼앗아도 된다는 믿음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배제하는 권리"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는 오히려 혐오와 차별을 지속시키고 사회를 평등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권리에 예외란 없다.
용기와 용기는 맞닿아 연대가 되고 이는 간절히 원하던 변화로 이어진다. 학교와 학교 밖 사회는 그 과정을 실천하는 교육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학생 인권의 시작이자 목적이다. "지혜복이 옳다"고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