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이라는 이름의 '타율'
언론탄압 특집호 시민기고 - 배호성
30대 초반 무렵의 어느 날 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 졸업했던 고등학교를 지나가던 길이었다. 각 교실 창가에 불빛들이 새어나왔다. 학생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심코 아내에게 "아직도 야자를 하네"라고 푸념했다. 그러고는 어두컴컴한 학교에서 형광등 빛이 뿜어져 나오는 교실 창가를 촬영하고는 개인 SNS에 비평했다. 저렇게 야자해서 무엇이 남느냐고 말이다.
소위 남들이 다 알고 있는 명문고도 아닌 평범한 고등학교에서 왜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공부시키려는 것인지 아직도 모른다. 고3 무렵 인터넷에 혹은 반에서 돌던 저마다의 급훈은 다음과 같았다. “성적이 오르면 배우자의 외모가 바뀐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수능을 잘 풀면 인생이 잘 풀린다” 등이 있었다. 우리 시절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좀처럼 청소년들의 공부 실태는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과열 경쟁이 되어 보인다고 할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우리 시절부터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샌드위치 세대라 평가받을 수 있는 80년대 중후반생이다. 윗세대나 아랫세대에 치이면서도 양자를 어떻게 보면 이해하고 있는 중립 세대일지도 모른다. '영포티'라는 신조어와 함께 까이는 신세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우리도 학창 시절에 ‘저항’이란 것을 나름 해보고 싶던 세대였다. ‘야간 자율학습’에서 제외되려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이유로 말이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전혀 ‘자율’이 아니다. 솔직히 ‘타율’이었다.
선생님들은 야간 자율학습에 빠져야 되는 이유를 대라고 압박하기 일쑤였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설득과 씨름이 부가적으로 진행됐다. 사실 우리 세대의 평범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크게 개입하는 경우가 적었다. 방과 후의 취미 생활도, 그냥 쉬고 싶음도, 그냥 자는 것도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세대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밤 09시~10시 사이였으며 교문 앞에는 학원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평번한 친구들이 가득 모인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소수였고 나머지는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애들이 많았다.
인생을 공부해야 하는데 점수를 위한 공부를 했고, 야간 자율 학습은 그저 수능 점수를 위한 강제성을 띠었다. 방학 때도 자유롭지 못했다. 보충 학습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보충 학습도 빠지려면 부모님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우리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의 수업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어른들이 정의를 내려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소위 잘난 대학 나와야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인지 의문도 들고 말이다. 실제 그렇게 말하는 학부모들이 있었다. 필자의 동창 중 하나는 당시 어머니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는 협박도 했었으니 말이다.
집에서 컴퓨터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키보드도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 넣고 다닌다고 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결국 좋은 대학을 가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청소년기에 겪어야만 하는 과정이었을까? 야자 시간에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나를 포함해 만화, 문학, 철학, 종교 서적 등을 읽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 나름대로의 이것이 ‘저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화책은 그렇다 치고 철학, 인문, 종교 서적 등을 읽는 친구들은 책을 빼앗기고 혼이 났다. 이럴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그 친구들이 보고 있던 서적들도 사실 나름의 ‘공부’가 아닌지 묻고 싶다. 진정한 지성의 발현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일어난다 생각한다. 어차피 점수 올릴 공부에 집중 못하는 우리는 나름의 공부를 할 자율성도 빼앗겼다. 소위 점수와 관련 없는 공부는 공부가 아닌 취급을 받았으니까. 명색이 자율학습이라면 정말 ‘자율’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요즘 야간 자율학습은 솔직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필자는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고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공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맡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성 교육자들이 청소년들에게 대하는 좋지 않은 태도는 다음과 같다. 정작 아이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과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면서 그것을 마치 다 아는 듯이 주입하는 태도다. 그러면서 똑똑하고 유능한 학생들이 비평 혹은 반론을 예의 있게 전달해도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뭘 알아?”
저 말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청소년들도 사실 알 것은 다 안다. ‘점수’를 위한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방향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을 고려하며 안내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것이 어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도 함께 사람됨을 배워나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