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은 동지가 될 수 있을까?

언론탄압 특집호 시민기고 - 서화

“쌤~ 왜 우리는 이거 하면 안 돼요?” 교육 현장에서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나 역시 교육실습생으로, 또 학원강사로 학생들을 만나며, 때로는 SNS나 청소년 집회 현장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이거’에는 주로 음주나 흡연이, 영화나 게임이, 때로는 피임 도구나 숙박업소, 또는 투표나 정치적 권리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내 머릿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한다. “이렇게 20살이라는 기준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누고 청소년의 행동을 보호하는 명분으로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권리 침해다”라는 글에 고개를 끄덕이며 RT를 누르다가도, 막상 현장에서 일하는 내 입에서는 위의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영어 선생님’이니까, 교생실습 기간 시사 토론부 동아리 시간에서 ‘청소년 참정권 특강’을 하다가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전동 킥보드 타는 것을 보면 ‘아 근데 저 학생들 잡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청소년도 비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참정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학생답지’ 못했던 행동을 들을 때마다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썼던 것을 이 글을 빌려 이제야 고백한다.

그럴 때마다, ‘정말 선생님은 동지가 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광장에서 같이 단결 투쟁을 외치고 막상 교실로 돌아와서 제발 영어 단어 좀 외우라고 잔소리하는 교사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교생실습에서 만난 한 학생에게 “광장에서‘는’ 우린 동지죠”라는 말을 하고 속으로 흠칫했을 때, 권력 구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선생-학생이라는 관계와 모두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동지라는 관계가 상충 됨을 몸소 느꼈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교실에서 동지는 못되더라도, 삼인칭 대명사를 배울 때 They가 성 중립적 단어임을 알려줄 수는 있으니까, 학생 주최 교내 토론대회 주제가 ‘민감하다’라며 막혔을 때 교장실에 같이 항의하러 갈 수는 있으니까, 작고 소중한 월급의 일정 부분을 떼서 청소년 인권 단체에 후원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견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 여전히 ‘쌤’은 동지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연대하지.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교육의 자리에서 조금은 특이한 ‘쌤’으로 청소년 권리를 향해서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