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민주의 이름으로 나는 고발한다
언론탄압 특별호 시민기고 - 자유인(필명)
들어가기 앞서서
“나는 고발한다”, 1898년, 로로르(L’Aurore)라는 신문에 제 1면에 실린 기사로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프랑스인 작가 에밀 졸라가 공개적으로 보낸 서한의 이름입니다. 이 서한은 ‘드레피스 사건’의 진실을 공개함으로써 민주주의와 혁명의 땅을 자칭했던 당시 프랑스에 만연했던 유대인을 향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진상을 자세히 고발하고, 사회정의와 모든 민족의 존엄성, 그리고 평등과 자유를 존중할 것을 시민사회에 요구하는 서한으로써 불평등과 탄압에 맞서는 비판적 지식인의 민주적 항쟁을 상징합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사회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개성을 존중받으며 자유로이 주권자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민주주의라 합니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하고 127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또다시 권력의 폭거에 의해 청소년독립언론 ‘토끼풀’이 탄압당하며 소수자의 권리와 자유, 존엄이 짓밟히는 사건을 목도하였습니다. 민주주의 공동체의 모범이자 교육의 장이 되어야할 학교에서 학생을 상대로 사실을 전달하고 폭넓은 시야를 제시하는 학생언론을 ‘불온매체’로 낙인찍고 이를 탄압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저는 그저 어리고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헌법과 생(生)으로써 부여받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권력이 억압한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그 사회의 비주류이며 대다수가 가진 민족성을 공유하지 않아서 그 시민적 권리를 억압당한 127년 전 프랑스 사회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프랑스 대문호 ‘에밀 졸라’가 쓴 글만큼의 문장력과 호소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평등한 주권자이자 고등학생이라는 주체로써, 경쟁교육이 초래한 비극, 학교의 권위주의적이며 비민주적인 문화를 만국에 ‘고발’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존경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지도자, 그리고 구성원 여러분, 대한민국은 민족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딛고 눈 깜짝할 새에 산업화와 정치구조의 민주화를 이룬 전례없는 국가입니다. 약 60년전, 수많은 서구의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한국에게 민주주의는 사치”라며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평가하였으나, 우리는 시민의 피땀과 헌신,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 완전히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권리행사의 반경이 자유로워지고 투명한 선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정치구조의 민주화’라는 위대한 진일보를 쟁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였던 7-80년대 일부 정치군인들이 없어졌을 뿐이지 정작 일상 속에서 소시민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수직적 문화, 권위주의적 정서, 그리고 소수자를 향한 탄압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독립언론 ‘토끼풀’ 탄압 사건의 진상은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와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오로지 시민과 학생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청소년독립운동 ‘토끼풀’은, 지난 달 은평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모 학교에게 원고 수정을 요구받고 ‘불온문서’로 규정되어 탄압당하는 등 부조리한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약 3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모범사례’, ‘선진사례’로 평가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자부하지만, 수십 년 전 군사독재와 같이 아직도 소수자와 독립언론을 향한 강한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청산되어야 할 교육의 권위주의와 비민주성과 시민사회가 한국교육에 민주주의를 완벽히 뿌리내리기 위해 당면한 과제가 아직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교육은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평등하며 존엄한 인간상을 그려낸다’는 민주주의 사회 교육의 취지를 결코 준수한 적이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고, 군사정권 당시에는 산업역군을 키웠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경제성장을 위한 인적자원을 교육하는데 목표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육은 ‘협력’이 아닌 ‘경쟁’이 핵심적 가치로써 오래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경쟁이 견인하는 긍정적인 효과, 즉 개인의 학습적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점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가 과열되어 학생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교육을 망가뜨렸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1960년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던 진보적 교육운동이자 혁명인 68혁명 당시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아도르노는 경쟁교육이 ‘나치즘을 낳는다’는 이유로 그 위험성을 선견지명 하였습니다. 경쟁교육은 나치즘의 사상적 기반인 ‘사회적 다위니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무너뜨리는 환경에서 ‘약하고 열등한 자’를 가려내고 오로지 ‘강한 자’ 만이 성공과 영광을 독점하는 것은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민주주의적 인간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며 교육에 파시즘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육이 ‘존엄한 인간상을 그려내는 방법’보단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만을 가르칠 때 학교는 민주주의의 요람이 아닌 파쇼권력의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모형이 될 것입니다.
한국 교육의 과열된 경쟁문화는 공동체의 동료인 학생들이 협력하며 상생하는 것을 배우기보단,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며 누군가는 낙오되기를 기도하는 퇴폐적이고 공격적인 문화적 정체성의 주입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학생들이 뜨거운 청춘을 보내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할 학교를,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학문의 즐거움을 깨우치는 참교육의 장이 되어야할 학교를, 전쟁터로 만들어내고 패배자들이 고통을 신음하며 승리자 역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갔다는 사실에 ‘찝찝한’ 승전보를 울려야하는 이 끔찍하고도 잔인한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경쟁교육의 폭거를 중단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존엄의 가치가 교육 속에 살아숨쉬는 ‘교육민주’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교육민주’의 가치는 어찌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과열된 경쟁교육을 해소하고 그 일환으로 대학서열을 철폐하며 학생이 공동체 시민으로써 함께하는 방법을 배우는 ‘협력교육’을 도입해야 합니다. 또한, 학교운영에 학생참여의 비중을 늘리고 학생회가 학생의 자주적이며 비판적인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학교구조의 민주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나아가 학생언론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언론자유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는 학생들이 공동체의 책임있는 구성원이자 존엄있는 민주시민으로써 성장하도록 발판을 마련할 것입니다.
무너지는 교육을 목도하며 가슴이 녹아내리는 심정으로 저는 교육민주의 가치가 지켜지기를 호소하고 더나아가, 청소년독립언론 ‘토끼풀’과 시민사회의 투쟁과 그 이념에 동의하고 지지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구성원과 지도자 여러분께 다음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하고 학생을 죽이는 폭력적인 한국의 경쟁교육을 고발합니다. 저는 교육민주의 가치를 억압하고자 하는 권위주의의 참혹한 진상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저는 진실을 침묵시키는 모든 권력을 고발합니다.
이 글이 그저 호소문으로써 남을 것이 아니라, 청소년과 시민사회가 억압에 항거하고 또다른 교육민주화와 참교육 항쟁의 횃불을 지피는 하나의 작은 불씨로써 역할을 하기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안녕을 기원합니다.
2025년 11월 3일 자유인 혜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