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탈팡' 못하는 우리

"기만" 쿠팡 반성해야 - 류하영 기자

어쩔 수 없이 '탈팡' 못하는 우리
서울의 한 가정 현관문 앞에 쿠팡 '로켓배송' 상자가 놓여 있다. 사진 문성호 기자
류하영 기자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현재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기숙사에 살고 있는 나와 친구들에게 쿠팡의 ‘로켓배송’으로 대표되는 새벽 배송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기숙사 학교의 특성상 특별한 용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하고, 매점에 없는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급하게 필요한 준비물과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을 당장 내일 수령할 가장 값싸고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새벽배송이다. 기숙사생에게 로켓배송은 단순한 쇼핑이 아닌 ‘생존 필수품’이 된 것이다.

이렇게 ‘로켓배송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번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그 이후 터져나온 노동 착취 문제는 더욱 큰 충격을 안겼다. 우리는 단돈 몇천 원의 멤버십 비용으로 편리한 서비스를 누린다고 믿었지만, 사실 우리의 소중한 개인정보와 노동자들의 땀방울로 서비스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었던 셈이다.

경제학에는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저렴하고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형태로 청구되고 있다는 뜻이다. 쿠팡 3,37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그 ‘대가’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배달 트럭이 골목길에 주차되어 있다. 사진 문성호 기자

이번 사태가 유독 충격적인 이유는 유출 사고 그 자체보다, 위기를 수습하는 기업의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사건 초기 사측이 발표한 피해 규모는 4,5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종 확인된 숫자는 무려 3,370만 명. 단순한 집계 오류라고 하기엔 그 간극이 너무나 아득하다.

데이터를 생명처럼 다뤄야 할 IT 플랫폼 기업이 자사의 금고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빠져나갔는지조차 즉각 파악하지 못했다면 이는 심각한 무능이다. 반대로, 사태의 파장을 우려해 알면서도 축소 발표했다면 이는 대중을 향한 명백한 기만이다. 무능이든 기만이든, ‘기술 혁신’을 자부하던 기업의 신뢰도는 돌이킬 수 없이 추락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유출된 데이터의 무게다. 단순히 이름과 연락처가 유출된 수준이 아니다. 고객 개개인의 주소, 현관 출입 비밀번호, 주문 내역까지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 이상의 가장 내밀한 일상이 타인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를 단순한 전산 사고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사태 수습을 위해 내놓은 대책은 실망을 넘어 당혹감을 안긴다. 쿠팡은 사과와 함께 5만 원 상당의 이용권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는 피해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보상이라기보다 ‘고도의 판촉 행사’에 가깝다. 우선 이 이용권은 현금 보상도 아닌, 자사 앱(쿠팡, 쿠팡이츠, 쿠팡 R.Lux등)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가 피해를 보상 받기 위해서는 내 정보를 유출한 그 플랫폼에 다시 접속해, 물건을 사고, 매출을 올려줘야 한다. 심지어 탈퇴한 고객은 재가입을 해야만 쿠폰을 받을 수 있다.

사과가 아니다. 심각한 유출 사태마저 매출 회복을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악용하겠다는 얄팍한 상술이다. 고객들의 분노를 관리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다. 정보 유출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오히려 회원 수 유지와 매출 증대로 연결되도록 설계된 셈이다.

여기에 3개월이라는 짧은 쿠폰 유효기간까지 더해지면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고객의 분노를 잠재우는 동시에 단기간 내 구매를 유도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소비자를 존중받아야 할 피해자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쿠폰 몇 장이면 금세 마음을 돌려 주문 버튼을 누를 매출의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이 투영된 결과다.

서울의 한 가정 현관문 앞에 쿠팡 '로켓배송' 상자가 놓여 있다. 사진 문성호 기자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를 충격에 빠지게 한 것은 비단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 거대 기업이 보여준 대한민국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였다. 쿠팡은 한국 시장에서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무기로 연 매출 78조 원을 달성했다. 한국인의 식탁과 옷장, 생필품 유통망을 장악하며 사실상 국민 인프라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책임의 순간이 닥치자 그들은 돌연 ‘이방인’의 얼굴을 했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가 시작되자 쿠팡은 미국 상무부에 구원을 요청하고, 투자사들은 미 정부에 조사를 청원했다. 지난 4년간 미국 정가에 160억 원이 넘는 로비 자금을 뿌렸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의 데이터로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도, 법적 제재 앞에서는 “우리는 미국 기업 Coupang, Inc.이니 미국 법과 정부의 보호를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이 힘없는 나라에서 자원을 수탈하면서도 자국민은 처벌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누렸던 식민지 경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3,370만 명의 정보가 유출된 것은 단순한 기술적 보안 실패가 아니다. 한국 소비자를 보호해야 할 주권자가 아니라, 오직 수익을 위해 채굴해야 할 데이터 광산으로만 여겼기에 발생한 필연적 참사다.

지난 30일 새벽 서울의 한 아파트에 쿠팡 배송 트럭이 주차되어 있다. 사진 문성호 기자

단순히 기업의 국적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책임의 소재다. 한국 시장에서 연간 수십조 원의 매출을 올리고, 우리 국민의 가장 내밀한 데이터를 수집하며 성장한 기업이 정작 위기 상황에서는 태평양 건너 미국 법인 뒤로 숨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국민의 정보를 보호하고 시장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대한민국의 법 집행이, 거대 자본과 외교적 명분에 밀려 힘을 잃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혁신이라 환호했던 로켓 배송 시스템이, 사실은 우리의 사법 주권을 무력화하는 ‘치외법권의 요새’였음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탈팡(쿠팡 탈퇴)’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육아에 지친 양육자,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 대형 마트가 멀어진 지방 거주자들 역시 이 편리함의 궤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잘못된 방향으로 발사되는 로켓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유출된 개인정보의 소중함을 알고도 말이다. 기업은 우리가 떠날 수 없다는 이 ‘어쩔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